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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섰던 세탁기, 생존을 위해 다시 돌아가다

영화 인생세탁소 스틸컷

제주 탑동에서 도심 속 해녀로 살아가던 옥희(문희경 분)의 공간에 사별한 남편의 딸 은영(강진아 분)이 불쑥 나타난다.

딸의 양육권을 되찾기 위한 목돈이 절실했던 은영의 목적은 명확하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인 세탁소를 처분해 권리금을 챙기는 것.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은영은 멈춰 섰던 세탁소 문을 열고 직접 세탁소를 재가동하기 시작한다.

이 냉정한 계산 위에 사태는 꼬여간다. 빚에 쫓기던 옥희의 아들은 어린 손주 준서를 버리듯 남겨두고 잠적하고, 옥희마저 사고를 당해 더 이상 바다로 나갈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은영은 옥희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지도, 의붓조카 준서에게 따뜻한 고모를 자처하지도 않는다.

세 사람은 각자의 서글픈 목적과 갈 곳 없는 생존 조건에 밀려 그저 한 지붕 아래 무심하게 얹혀사는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에서 제주 탑동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서사의 배경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1988년 해안 매립 사업을 거치며 해녀들의 터전이었던 바다는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 묻혔다.

거대 자본과 도시 개발 논리에 밀려 정체성을 박탈당한 탑동의 역사는, 부상으로 인해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옥희의 쇠락한 신체, 그리고 개발업자들의 표적이 된 오래된 세탁소의 처지와 정확히 교차한다.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각박한 현실의 무게에 등 떠밀려 깊은 결핍을 안고 있다.

자식을 버린 아들의 무책임성, 양육권이라는 현실적 조건 앞에 조바심을 내는 은영, 부모의 부재로 방어기제를 드러내는 준서까지.

탑동 해안 바닥에 묻힌 매립의 역사처럼, 이들의 내면에도 차마 표출되지 못한 유기의 상처와 묵은 때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문숙희 감독은 이 인물들을 작위적인 화해나 신파적 극복으로 밀어 넣지 않는다.

<인생세탁소>가 보여주는 연대의 힘은 헌신이나 간병 같은 대단한 온정이 아니라, 덤덤하게 유지되는 생활의 관성에서 발현된다.

은영은 세탁소를 거창한 사명감으로 운영하지 않으며, 옥희와 준서 역시 무리해서 가족의 역할을 수행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한 공간에서 찌개 끓는 소리를 공유하고, 무심히 둘러앉아 밥을 먹는 일상의 건조한 반복은 역설적으로 인물들 간의 팽팽한 경계심을 완화시킨다.

은영은 의붓조카 준서의 까칠함 속에서 타자화 된 자기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구체적인 대사나 각성 없이도, 한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주고받은 묵묵한 시선은 비혈연 개체들 사이에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의 끈을 매어준다.

영화 <인생세탁소>는 자본의 논리가 모든 인간적 가치를 덮어버리는 시대 속에서 질문을 던진다. 혈연이나 법적 틀이 과연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영화는 극적인 세탁소의 사수나 경제적 반전 대신, “그냥 같이 살며 밥을 먹었던” 그 덤덤한 생활의 기억이야말로 거대 자본 속에서도 마모 되지 않는 인간의 유산임을 입증한다.

묵은 상처를 씻어내는 것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한 끼의 밥상과 덤덤하더라도 조용하고 단단한 작가적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는 4일 개봉.

/마이스타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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