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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치유하는 건, 온기

영화 수련 스틸컷

청춘이라는 단어는 흔히 빛나는 도약과 열정의 이미지로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영화 <수련>이 가리키는 청춘의 실상은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좁고 습한 차가운 바닥이다.

미디어가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청춘의 화려한 환상을 시원하게 벗겨낸 이 영화는, 벼랑 끝에 내몰린 인물들이 겪는 미세한 균열과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그 진흙탕 밑바닥에서 피어나는 작지만 끈질긴 회복의 숨결을 서늘하도록 정교하게 관찰한다.

배우를 꿈꾸는 효원(이홍연 분)과 고등학교를 중퇴한 은서(최은서 분)는 함께 집을 나와 서울로 상경한다.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견디며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차가운 현실의 벽 앞에서 두 사람의 삶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효원이 극단의 단역 자리를 얻기 위해 영향력 있는 유명 배우의 집에 기거하면서, 서로가 세상 전부였던 두 사람 사이에 미세한 균열과 깊은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 끝에 두 사람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비극적 방향으로 달려간다.

제목인 수련(Water Lily)은 이들의 위태로운 삶을 관통하는 직관적인 은유다. 물 위에 단정하게 떠 있는 꽃은 보기엔 아름답고 찬란해 보이지만, 정작 꽃을 받치고 있는 수면 아래는 어둡고 더러운 진흙탕이다.

거센 물결에 금방이라도 휩쓸려 내던져질 듯 불안하게 나부끼는 꽃처럼, 효원과 은서의 삶 역시 비정한 사회 구조와 경제적 빈곤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매 순간 흔들린다.

예술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갈망하는 효원과 오직 효원만을 의지해 세상을 버티는 은서의 감정은 서울이라는 차가운 공간 속에서 수시로 엇갈린다.

영화 <수련>은 외부의 물리적 위협이 아닌,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균열에 집중한다.

효원은 단역이라도 따내기 위해 극단 내 권력을 쥔 배우의 집에 기거하는 선택을 한다.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위계질서와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효원은 꿈을 위해 묵묵히 참아낸다.

하지만 바깥에 홀로 남겨진 은서는 깊은 소외감과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효원의 이러한 선택은 은서에게 가혹한 절망으로 돌아온다. 영화 속 인물들이 연습하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속 대사들은 무대 위 허구를 넘어, 두 청춘이 처한 잔혹한 현실과 정교하게 오버랩된다.

체호프의 세계처럼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지만, 자신의 결핍과 고통에 눈이 멀어 정작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다.

모두가 각자의 고통에 파묻혀 서로에게 가시를 세울 때, 인철(박인철 분)은 차분한 쉼표를 찍는다.

사회적으로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태로운 두 동생의 곁에서 묵묵히 방을 닦고, 버려진 책상을 가져다주며, 깨진 욕조에 방수 테이프를 붙여준다.

카메라가 인철이 책상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Low-angle)로 포착한 것은, 그의 사소한 배려가 지닌 가치를 시각적으로 입증한다.

인철은 수면 아래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산소를 공급하며 생태계를 살려내는 수련의 뿌리 같은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 속에서도 <수련>이 절망의 늪에 완전히 빠져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인철과 같은 온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은 온통 진흙탕이고 청춘의 꽃은 당장이라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듯 위태롭지만, 그 거친 물결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대단한 구원이나 기적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지극히 작고 소소한 관심이다.

욕조를 가지고 싶다는 은서의 말에 작은 집에 무슨 욕조냐고 타박하는 대신 함께 욕조를 사고, 구멍 난 욕조에 방수 테이프를 붙여 보수해 주는 인철의 무심한 손길, 멀리서 몰래 도시락을 놓고 가는 할아버지의 조용한 시선처럼, 우리가 서로를 향해 건네는 작은 온기야말로 절망과 우울을 견디게 해 주는 힘이 된다.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의 일상에는 누군가의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 줄 작은 방수 테이프 한 조각이 준비되어 있는가?

이찬호 감독이 그려낸 청춘은 서늘하고 아프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설 때 가슴 깊은 곳에 남는 것은 차가운 절망이 아닌, 타인의 온기와 희망이다. 오는 19일 개봉.

/마이스타 박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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