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가져다준 해방

“좋은 날이란 고통이 없는 날이다.”
다이나 오니우나스-푸시치 감독의 데뷔작 영화 <튜즈데이>는 독창적인 판타지 설정을 빌려 죽음의 이면을 응시한다.
영화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약탈이 아닌 ‘궁극의 자비’이자 ‘고통에서의 해방’일 수 있음을, 삶의 끝자락에 선 10대 소녀 튜즈데이(로라 린 분)를 통해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다.
영화 속 죽음의 형상은 기괴하면서도 서글프다. 검은 망토를 쓴 전형적인 해골 대신, 온몸에 오물이 묻고 전 세계의 비명소리에 지쳐버린 앵무새가 등장한다.
수천 년간 인류의 고통을 실시간으로 수집하며 영혼을 거두어온 이 앵무새는, 망자의 넋을 인도하며 이승과 저승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우리 전통의 저승사자를 연상시킨다.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우주적 질서를 수행하는 고독한 일꾼이라는 점에서, 영화 속 앵무새는 서구적 사신보다 동양적 사후 세계의 고뇌에 더 가깝게 닿아 있다.
주인공 조라(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 분)는 딸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진실을 견디지 못해 겉돌며 딸 마주하기를 피한다.
그녀의 현실 부정은 죽음(앵무새)과 직면했을 때 극에 달한다.
조라는 딸을 데려가려는 앵무새를 물리적으로 공격하고, 급기야 그 존재를 없애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앵무새를 통째로 삼켜버린다.
하지만 앵무새를 삼킨 조라가 마주한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었다.
앵무새를 통해 인류의 고통과 튜즈데이의 비명이 조라의 감각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그제야 조라는 자신이 외면해 왔던 딸의 실제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뼈저리게 이해한다.
딸을 곁에 두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던 자신의 집착이, 실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를 죽음의 감각을 공유하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셈이다.
영화는 떠나는 자의 평온함만큼이나 남겨진 자가 겪어야 할 형벌 같은 고통에도 주목한다.
조라가 광기를 부리며 죽음에 저항하는 모습은, 사실 딸을 잃은 뒤 찾아올 거대한 상실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벌이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떠나는 자는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정적 속으로 들어가지만, 남겨진 자는 그 정적을 홀로 채워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는다.
조라의 분노와 슬픔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에서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공포에서 비롯된다. 결국 영화는 슬픔을 억지로 부정하기보다, 딸의 평안을 위해 자신의 상실감을 견뎌내는 것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애도임을 보여준다.
후반부, 그토록 피하고 싶던 죽음의 그림자 앵무새가 조라의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이는 조라가 마침내 죽음을 삶의 순리로 받아들이고 딸의 해방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우리가 죽음을 거부할 때는 그것이 거대한 괴물처럼 삶을 압도하지만, 이를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순간 죽음은 비로소 품에 안을 수 있는 가벼운 무게가 된다.
영화 <튜즈데이>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는 한 편의 시와 같다.
소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깊은 정적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좋은 날’일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말한다.
“좋은 날이란 고통이 없는 날이다.”라는 대사는 우리가 막연히 가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한순간에 뒤흔들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 <튜즈데이>는 오는 14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박선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