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흔적 찾다가 마주한 여성의 현실
남 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라, 남들처럼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대학생이던 10년 전) 어느 날 아빠의 전화 한 통으로 꿈이 깨졌다.
술에 취한 아빠가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마라”고 말했는데, 이 통화로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에 자살한 고모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3년 전에) 술 취해서 나한테 고모에 관해 이야기한 것 기억하냐고 물으니, 살짝 당황한 아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모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딱히 들려줄 얘기가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에 감독은 고모의 이름과 출신학교를 알아내 고모를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나선다.
서울에서 만난 고모의 친구는 감독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고모를 꼭 닮았다며, 고모는 리더십도 있고, 인기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고모는 늘 당당했지만, 한편으로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느낌도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고모는 광주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전남여중, 전남여고를 나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어 했지만, 장녀가 동생들이나 돌보라는 할아버지 때문에 전남대에 진학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그림을 꽤 잘 그렸던 고모는 늘 색을 흐리게 사용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는 그게 더 좋다고 했다고 한다.
고모의 대학 동아리 친구는 고모가 “좋은 남편감을 찾기 위해 동아리에 들어왔다”고 말했다며, 당시 아주 당찬 여학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선 순종적이었던 고모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감독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서류를 떼어보니 고모의 사망일이 1970년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남아있는 고모의 사진은 1975년에 찍은 것이다.
고모의 20대가 어땠길래 고등학생 때 죽은 것으로 신고했는지 파고 들어가 보니, 고모가 남자 친구 집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엔 ‘여자가 남자 집에서 죽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온갖 화살이 고모에게 돌아올 수 있는 시대여서일까? 가족들은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고, 지금껏 고모의 존재를 아예 말도 안 하고 지내왔다.
이에 감독은 지금도 데이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제라도 고모에 대해 가족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비에 고모의 이름을 새기자고 아빠한테 제안한다.
이런 주장을 담은 감독의 편지를 읽은 아빠는 미처 본인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며, 누나 ‘지영’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양양>은 자살(감독은 어쩌면 데이트 폭력으로 고모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로 20대 때 생을 마감한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된 감독이 고모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똑똑하고 당찬 고모였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고모는,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고모의 지인들은 기억한다.
너무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남자 친구에 의해 살해됐는지는 당시 경찰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서 모르지만, 가족들조차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모를 수치스럽게 생각해 그동안 입밖에 고모의 존재를 내지 않고 살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술 취한 아빠 때문에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된 양주연 감독은 고민 끝에 3년 만에 가족들한테 고모의 흔적을 찾는 여정을 카메라에 담겠다고 했고, 딸의 직업을 이해하고 있는 터라 딱히 반대는 없었다고 한다.
고모의 남자 친구를 찾아볼까도 했지만, 정확한 이름도 모르거니와 이미 세상을 떠난 고모는 당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자 친구의 일방적 주장이 담길까 봐 찾지 않았다고 한다.
고모의 죽음에서 시작해 여성의 인권으로 이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양양>은 22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