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게 하는 것

최근 전통 예술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 화려한 이면에는 전승의 맥을 잇고자 분투하는 예인들의 실존적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수궁>은 무대 뒤편, 소멸의 위기 앞에 선 여성 소리꾼들의 삶을 건조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영화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인 정의진 명창과 그 길을 따르는 제자들의 일상을 교차한다.
80세를 넘긴 명창은 자신의 대에서 동편제 소리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제자들을 독려하고, 젊은 이수자들은 각자의 삶을 꾸려가면서도 스승의 소리를 한 마디라도 더 담아내려 애쓴다.
카메라는 연습실의 정지된 공기와 무대 위의 역동적인 소리를 오가며, 소리가 한 인간의 몸에서 다른 이의 몸으로 전수되는 과정을 묵묵히 관찰한다.
영화는 토끼와 자라의 우화를 넘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어놓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이들의 ‘진짜 이야기’에 집중한다.
특히 <수궁>은 여성 소리꾼들이 마주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과거 판소리사는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으며, 여성 예인들은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가사 및 양육이라는 이중고를 견뎌야 했다.
영화 속 제자들 역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생계 유지와 예술적 완성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전업 예술가로 살아가기 척박한 토양 위에서, 이들은 ‘여성’이라는 현실적 배경과 ‘예인’이라는 사회적 소명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사라짐’에 대한 불안이다.
전통 예술의 전승은 단순히 기술의 습득을 넘어 한 시대의 정신과 예술적 원형을 보존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빠른 변화와 대중의 관심 저조는 ‘대 끊김’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정의진 명창이 겪는 “내 소리가 나에게서 끝날 수 있다”는 공포는 개인의 고뇌를 넘어, 한국 전통 문화가 직면한 거대한 단절의 위기를 상징한다.
감독은 이를 신파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연습실의 먼지 낀 풍경과 깊은 한숨 소리를 통해 전승의 무게를 시각화하며 관객에게 전통의 가치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예인 개인이 짊어진 전승의 무게는 이제 대중의 일시적인 관심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전통문화의 대물림은 개인이 사명감만으로 감당하기에는 경제적·사회적 장벽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무형유산 이수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수련에 정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책과 더불어, 기록화 사업 및 교육 인프라 확충 등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절실하다.
전통은 단순히 유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살아남게 하는 것이며, 그 생존의 토양을 만드는 것은 국가의 중대한 책무다.
영화 <수궁>은 화려한 미장센 대신 인물의 표정과 소리의 질감에 집중하며 전통 예술가들이 짊어진 고독을 담백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는 특정 장르의 보존을 호소하는 기록물을 넘어, 사라져가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를 더 이상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경고를 담고 있다.
사라지는 소리를 붙잡는 일은 결국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수궁>은 내달 1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박선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