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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업가에서 정치인이 되기까지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나중에 임금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갓 태어난 동네 아이가 나중에 임금이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

꽤 공부를 잘했던 소년을 위해 그의 엄마는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이사했다.

전국 7대 도시 중 한 곳인 목포는 역시 큰 세상이었다.

소년은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취업했다.

이후 그는 돈을 모아 배 한 척을 사서 해운회사를 차렸고, 그렇게 번 돈으로 신문사도 사들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났고, 사업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에 한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 일로 후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를 목격한 그는 독재에 맞서기 위해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3번이나 떨어졌다.

때문에 가난해졌지만, 그의 아내가 계속 지지해 줬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병에 걸려 결국 32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지만, 그는 또 선거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평소 그의 언변을 눈여겨 본 장면 총리가 그를 여당 대변인으로 임명하면서 정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1961년 5월 강원도에서 보궐선거를 통해 민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다음 날 박정희 육군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국회를 해산했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재빨리 서울로 올라와 의원 등록을 마친 그는 의정활동 한 번 못 해보고, 부패세력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법에 의해 어떤 정치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만난 YWCA 총무와 서로 터놓고 정치 얘기를 했고, 서로 잘 통했는지 그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다.

그렇다 ‘그’는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YWCA 총무는 이희호 여사다.

이후 그는 한일협정 당시 야당을 정책 정당으로 바꿔야 한다며 ‘대중경제론’과 ‘지방자치제’를 주장했다.

또 그는 메주 주민들을 상대로 여러 이슈에 대해 강연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다시 당선되지 못하도록 1967년 선거에서 조직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모든 부정선거에 대비한 김대중 후보가 다시 당선됐다.

문제는 부정선거로 목포지역 외의 지역에서 참패한 신민당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통과시키자, 새로운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비주류였던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향토예비군 폐지와 남북교류 등 그의 공약은 신선했지만, 결국 현직 대통령을 이기지는 못했다.

600억 원이나 쏟아부어 고작 90만 표 차이로 이긴 박정희는 이번 선거를 지역감정의 결과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치료차 일본에 간 김대중이 유신체제를 비판하자,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김대중의 행방을 추적한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택연금 됐다.

가택연금을 뚫고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한 그는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기꺼이 감옥행을 택했다.

다시 시민들이 일어났고, 박정희는 또 계엄령을 발동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자,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루는 것인데, 이건 아니다 싶어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그를 사면·복권 시켰다.

김영삼이 신민당 재입당을 권하자, 그는 자기의 정치적 동지들과 일괄 입당을 제안했으나 거절 당했다.

당으로 돌아온 김대중의 세력이 강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대중도 김영삼의 제안을 거절했다.

‘서울의 봄’을 위해 그는 대중 앞에 다시 섰다. 그렇게 국민들도, 김대중도 희망을 보게 됐다.

이에 신군부는 김대중과 그의 장남, 측근들을 불법 연행해 두 달 동안 고문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거짓 자백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조사기간에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에게 한 달도 더 지난 신문을 건넸다.

그때서야 광주에서 5·18이 일어난 걸 안 김대중은 기절했다.

전두환 정권은 5·18을 김대중과 연계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미국 유학파인) 이희호 여사가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미국과 영국 등 세계 각국 정치인들이 청와대에 김대중의 사형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보내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감옥에서 병세가 악화되자, 안기부장이 이희호 여사에게 병 치료를 목적으로 미국에 (유배) 갈 것을 권했다.

아내의 설득에 결국 김대중은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워싱턴으로 간 그는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다 1985년 총선을 4일 앞두고 그가 귀국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국 하원의원과 가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장 등 사회 저명인사 27명이 동행했다.

그의 귀국으로 신민당이 선거에서 제1야당이 됐고,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권은 그를 가택연금 시키고, 시위 참가 대학생 1,300여 명을 잡아들였다.

김대중이 전두환에게 자기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며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담은 ‘6·29 선언’을 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되면 불출마하겠다고 한 김대중의 제안은 이미 거절된 후라 김대중은 이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6·29선언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광주로 향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내년 1월 6일로 탄신 100주년을 맞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청년사업가 김대중이 어떻게 정치인으로서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6·29선언 이후, 대선 출마를 결심한 그가 광주로 가는 것까지만 보여준다.

그 이후의 여정은 이미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의미도 있어야 하지만 볼거리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치인 김대중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 대목까지만 넣었다는 게 1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감독이 밝힌 설명.

또, ‘이런 정치인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 것이지, 지금의 우리 정치권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든 건 아니라고.

그렇기에 정치인들이 이 작품을 그냥 평전(評傳)처럼 보고, 본인들이 알아서 각자 느꼈으면 한다는 게 민환기 감독의 바람이다.

그는 또, 1987년 이후 김대중이 한 여러 선택 중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 이전의 이야기를 이번 편에 담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패(成敗)를 객관적으로 담아보고 싶다며 후속작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인간 김대중 그리고 정치인 김대중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내달 10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이경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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