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가 있을까?

장-뤽 고다르 감독의 1963년작 영화 <경멸>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냉혹한 파국을 그린 작품 중 하나다.
시대를 앞서간 감각적인 스타일을 자랑하던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여전히 날카로운 시사점을 던진다.
특히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현대 자본주의가 결탁했을 때, 여성의 신체와 존엄이 어떻게 자유라는 미명 하에 소비되고 파괴되는지 스크린을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영화는 6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섹스 심볼이었던 브리지트 바르도(카미유 역)의 전라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침대에 누운 카미유는 남편 폴에게 자신의 발, 엉덩이, 가슴을 가리키며 “내 몸의 이 부분이 마음에 들어?”라고 묻고, 폴은 “전부 다”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언뜻 달콤한 부부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이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 주체에 의해 어떻게 조각나고, 평가 받고, 소유 되는지 폭로하는 프레임이다.
카미유는 남편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놓인다. 자본의 압박(여배우의 나체를 넣으라는 제작자의 요구)으로 탄생한 이 오프닝에서 고다르 감독은 원색의 필터를 끼워 성적 대상화를 차단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연출은 영화 산업 자체가 여성을 어떻게 시각적 상품으로 소비하는지 그 추악한 단면을 관객이 가장 먼저 목격하게 만든다.
카미유의 비극은 그녀의 신체와 매력이 남성들의 비즈니스 테이블 위에서 거래 조건으로 쓰이면서 본격화된다.
시나리오 작가인 폴은 미국의 거대 자본가 프로코슈와의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프로코슈가 자신의 아내에게 노골적인 흑심을 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그의 스포츠카에 동승시킨다.
여기서 카미유의 의견이나 감정은 완벽하게 소외된다. 남편 폴은 자본 권력 앞에서 비겁하게 방관하며 아내를 사실상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제작자 프로코슈는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태도로 그녀를 소유하려 든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현대 자본주의가 결탁했을 때, 여성은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남성들의 권력 게임과 자본 거래를 원활하게 만드는 매개물(소품)로 전락한다는 점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지점은 남편 폴의 이중적인 태도에 있다.
폴은 결코 카미유에게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당신이 원치 않으면 타지 않아도 돼”,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라며 철저히 카미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속물근성과 비겁함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인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폴은 이미 자본의 유혹에 굴복해 계약을 맺고 싶어 하면서도, 아내를 프로코슈의 스포츠카에 타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선택권을 주는 척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인 것은 너의 선택”이라고 도덕적 책임을 아내에게 교묘히 전가한다. 더 나아가 폴은 아내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아내가 프로코슈의 유혹을 완벽하게 쳐내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아내가 자본의 유혹에 흔들리는지 음험하게 관찰한다.
자신이 아내를 자본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놓고는, 아내가 상처받아 차가워지자 오히려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구냐”며 적반하장으로 따져 묻는다.
이러한 폴의 이중적 시선은 여성에게 탈출구 없는 딜레마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가스라이팅의 전형이다.
고다르 감독은 이러한 인간들의 치졸한 거래와 파국을 푸른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을 통해 내려다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조각상들은 우리가 아는 고결한 순백의 대리석이 아니다. 조각상의 눈과 입술에는 파란색과 빨간색 페인트가 기괴하고 조잡하게 칠해져 있다.
이 페인트칠 된 조각상은 거대 할리우드 자본(프로코슈)이 고전 예술과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천박하게 가공하고 오염시키는가에 대한 시각적 은유다.
자본주의는 대중의 말초적 자극과 상업적 이윤을 위해 역사적 고전이든, 여성의 신체든 가리지 않고 자극적인 색을 입혀 상품으로 탈바꿈시킨다.
순수한 예술적 영혼과 인격적 가치를 거세당한 채, 자본의 입맛대로 화장 당하고 박제된 조각상의 모습은 영화 산업 안에서 오직 ‘섹스 심볼’의 프레임에 갇혀 소비되던 카미유(혹은 실제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의 처지와 거울처럼 닮아있다.
신들마저 자본의 페인트칠에 눈이 멀고 우스꽝스러워진 세계에서, 자본도 권력도 없는 일개 여성이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을 지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남편이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척하며 사실은 거래의 도구로 던졌고, 자신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있었다는 본질을 간파한 순간, 카미유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향해 선언한다. “당신을 경멸해.”
이 ‘경멸’로 카미유가 가진 주체성이 표출된다.
남성들이 짜 놓은 위선적인 시나리오와 자본주의의 거대한 포식망 속에서, 카미유가 행사할 수 있는 진짜 자유는 감정의 거부권뿐이었다.
그녀는 폴의 구차한 변명과 애원을 차갑게 밀어내고, 무심하게 콜라를 마시며 소통을 단절한다.
신화 속 페넬로페가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20년간 인내의 침묵을 지켰다면, 현대의 카미유는 남편의 위선과 비겁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거부한다.
그녀의 경멸은 가부장적 권위가 주는 안정감을 거부하고, 비록 고립될지언정 자신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카미유는 결국 능동적으로 이별 편지를 쓰고 프로코슈의 차에 올라타 로마로 떠난다.
남성 중심의 집(가정)을 박차고 나간 주체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고다르는 그녀에게 쉽게 해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가 올라탄 스포츠카는 결국 자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또 다른 남성의 영역이었고, 그 끝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예정해 둔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다.
앞서 남편 폴이 자신의 비겁함을 숨긴 채 선택권을 주는 척 아내를 시험하고 방조했던 그 이중적인 시선은, 결국 시스템을 탈출하려 했던 여성을 더 거대한 착취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는 잔인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가 보여주는 냉혹한 시각적 은유들은, 1960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품을 벗어났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늘한 진단이다.
시스템을 완전히 탈출한 대가가 무엇인지 스크린을 통해 묵직하게 보여주는 이 결말은 잔인하리만큼 현실적이다.
영화 <경멸>은 스크린 안팎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들의 세계를 스펙터클하게 보여준다.
‘너에게 선택권이 있다’며 부인을 시험하고 가스라이팅했던 폴의 이중성과, 고귀한 조각상의 눈마저 천박하게 칠해버리는 자본주의의 맹목성은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겉으로는 자유를 주는 척하면서 어떻게 본질적인 죄책감과 상품성을 강요하는지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카미유가 남긴 ‘경멸’이라는 단어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남성 중심의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거부하고 경멸하는 것 외에 어떤 진정한 자유가 존재할 수 있는가? 영화 <경멸>은 오는 15일 개봉한다.
/마이스타 박선영 기자

